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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70명과 바람을 피운 한국판 카사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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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영수 조회1,068회 댓글0건 작성일20-07-26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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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6월 어느날이었다. 이화여대생을 비롯한 70여명의 여인을 간통한 세칭 ‘박인수 여대생 간음 사건’은 전국의 각계각층에 걸쳐 화제가 파다했던 것이다


.희대의 바람둥이 박인수는 헌칠한 키에 알맞게 떡 벌어진 가슴과 어깨를 지닌 그야말로 사내다운 풍모를 갖춘 26세의 젊음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거기다 여인들에게 세심한 주의와 예의로 호기심을 사는 이른바 사교춤의 명수였다.


그는 경남 김해군 출신으로 서울 동국대학교 사학과 2학년 재학중에 6·25동란을 맞이했다.그는 6·25사변이 발발하자 뜻한 바 있어 해군장교로 입대했다. 국가관이 투철한 그는 어느덧 해군 헌병 대위가 되도록 군복무에 충실하였다.



그는 신분이며 직책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활동과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어 고급 사교장에 빈번히 드나들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여인들과의 친교가 시작되었다.이때 그와 약혼한 여인이 그의 아무런 양해도 없이 그를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근무지를 이탈하여 그 여인만을 쫓아다니다가 결국 군기 문란과 무단 이탈죄로 1954년 4월 초순경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불명예 제대가 되고 말았다. 한 여인의 배반이 가져다 준 상처는 그에게 너무나 컸다.


그는 고뇌의 몸부림 끝에 마침내 세상의 모든 여인을 적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그를 배반한 여인과 꼭 같은 방법으로 모든 여인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그는 그가 말하는 여인들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하여 제대와 동시에 반납해야 할 신분증과 공무집행증을 반납하지 않고 그대로 소지한 채 현역 해군 대위의 행세를 하면서 그동안 친교로 맺어진 여인들을 찾아다니며 댄스에 열중하였다. 



카사노바의 엽색 행각은 수십 년에 걸친 것이었지만 박인수의 행각은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겨우 14개월 동안 이뤄졌다.



 

이 사건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박인수가 만난 여성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도 많았다는 사실과 그의 여성 편력도 편력이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박인수에게 넘어갔다는 사실마저 커다란 화제가 됐다. 



판사에게는 이색적인 편지가 쏟아졌다. “정조는 아니고 키스만 빼앗겼는데 그만 병을 얻어 몸져 누웠으니 엄벌에 처해달라”는 여자의 편지, “딸이 증언대에 서면 자살할지 모르니 선처 바란다”는 어머니의 탄원, “기소장에는 우리 친구가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12명의 여자 동기들의 연판장까지.

 




검찰은 박을 혼인빙자 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이 죄는 친고죄. 박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둘 뿐이었으며, 그나마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여성은 네댓밖에 안됐다. 하지만 공판날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기소장에 기재된 내용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① 아직 총각임을 기화로 해군 헌병대위로 사칭하고 결혼을 빙자하여 미혼여성의 정조를 유린할 목적으로 1954년 4월 초순경 약 15일간 서울시 사직동에 자리잡고 있는 ‘송죽여관’ 및 종로 3가 철원여관 등 여러 곳의 여관에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2년생 임봉혁(23세·가명)과 하등의 결혼할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할 것처럼 속여 전후 15회나 정을 통했다. 


② 1954년 5월 초순경 시내 안국동 모 여관에서 결혼을 빙자하여 이화여고를 졸업한 노귀순(23세·가명)을 전후 15일간 20회 가량 정을 통했다.



③ 1954년 10월 초순경 시내 마포구 대흥동 ‘마포여관’에서 이화여대 체육과 2년생 김경희(23세·가명)를 역시 결혼을 빙자하여 30일간에 걸쳐 20회가량 정을 통했다.



④ 1954년 10월 초순경 시내 사직동 ‘서울여관’외에 여러 여관에서 역시 결혼을 빙자하여 이화여대 체육과 2학년 송인순(21세·가명)과 전후 30일간에 결쳐 정을 통했다.


⑤ 1955년 1월 초순경 시내 봉래동 ‘경성여관’에서 역시 결혼을 빙자하여 이화여대 가정과 임한희(22세·가명)와 전후 4일간에 걸쳐 정을 통했다. 이상과 같은 기소 사실외에 검찰에서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소송권 포기사용으로 인하여 처벌하지는 않았으나 그외 수 십명이 피해자였음은 검찰에서 시인하였다. 




피해자들의 인권 보호 주장에도(동아일보 1955년 7월 4일자)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고인 박씨와 피해 여성들의 얼굴을 보려고 연일 1만명에 가까운 방청객이 몰려 재판 진행이 어려웠다. 구름 같은 방청객들을 정리하려고 기마경찰대까지 출동할 지경이었다. 방청객은 주로 여대생과 주부가 많았고 소설가, 갓 쓴 노인도 더러 있었다.(경향신문 1955년 7월 10일자) 그러나 여성들은 대부분 재판에 나오기를 거부하고 잠적했다. 어느 신문은 이 재판을 ‘법정 최대의 쇼’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공판에서 검사는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하자, 


이날 공판에서 피고인 박인수는 기소사실 중 간음행위에 대하여는 대체로 이를 시인하였으나 범죄 구성 요건이 되는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들과는 결코 결혼을 약속한 사실이 없었으며 또 약속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녀들은 다만 서로가 수차에 걸친 댄스홀 출입중에 상대하게 된 것이며 밤 9시 30분경 댄스홀에서 

나와 여관에 갈 때에는 남자 4,5명과 함께 그녀들도 4,5명씩 함께 따라와 밤늦게까지 놀다가 동침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댄스홀에서 함께 춤을 춘 후에는 으레 여관으로 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으며

나의 경험으로는 댄스홀에 나오는 여자중에 진짜 처녀라고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고소로 구속된 박씨는 피해자 70여명 중 미용사 직업을 가진 여성 단 한 명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나중에 ‘여성이 순결할 확률은 70분의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신문들은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져 피해자들의 이름과 학교 등 신상을 버젓이 공개했다. 

 




이에 권순영 판사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판결을 내린다.

공무원 사칭죄는 유죄를 인정하면서 혼인빙자간음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였고

“댄스홀에서 만난 정도의 일시적 기분으로 성교 관계가 있었을 경우

혼인이라는 언사를 믿었다기보다 여자 자신이 택한 향락의 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법은 보호 가치가 있는 정조를 보호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박인수 피고에게 공무원 자격 사칭에 대해서만 2만 환의 벌금형을 과했다.

남녀관계에서 ‘가해자는 항상 남자요,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천년의 공식이 깨진 것이다. 

여성의 순결과 정조에 관해 도덕의 색안경을 벗은 현대적(?) 판결이 내려진 거다.






 

그러나 세간은 떠들썩했고 검찰은 항고했다. 항소심에서 박인수는 징역 1년 형을 받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고의로 여자를 여관에 유인하는 남성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는 게 유죄 판결 이유였다.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던 1950년대 한국의 웃지 못할 풍속화다. 자유로워진 성 풍속도, 그러나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던 윤리의 이중 잣대, 미군 문화를 통해 전파된 춤 바람과 댄스홀, 이 모든 새로운 사회문화 코드의 조합이 박인수 사건으로 응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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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daum.net/gmania6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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